2017년 10월 미국의 하비 와인스틴 성범죄 파문으로 시작된 미투 운동은 한국에서도 서지현 검사의 안태근 성추행 폭로, 김지은 비서의 안희정 충남지사 성폭력 주장, 최영미 시인, 박진성 시인의 고은 시인 성추행 폭로, 해외선교 봉사자 김민경 씨의 한만삼 신부 성폭행 시도 폭로 등이 줄을 이었으며, 최근에는 체육계에서 쇼트트랙 심석희 선수의 조재범 전 코치 성폭행 폭로가 있었다.
미투 운동은 여러 법적 이슈들을 제기한다. 연극 배우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 성폭행한 이윤택 감독은 1심에서 징역 6년이 선고되어 항소심이 진행 중인 반면 안희정 충남지사는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고, 역시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안태근 검사는 공소시효 문제 때문에 직권 남용 혐의만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근대 형법의 대전제는 죄형법정주의와 무죄 추정원칙이다. 사극에서 보는 “네 죄를 네가 알렷다”는 식의 원님 재판이 아니라 사전에 법으로 규정된 범죄행위에 해당되는 경우에만 처벌이 가능하며, 법원에서 확정 판결이 내려져야 비로소 범죄자로 인정된다. 따라서 형법에서 성범죄를 어떻게 규정하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현대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권리가 향상되면서 자연히 성범죄에 대한 처벌 기준도 강화되었다. 성범죄의 성격 자체도 남성의 재산(딸, 부인) 훼손이나 정조 침해, 풍기 문란이 아니라 여성(또는 남성)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로 바뀌었다.
세계적으로 강간죄의 정의가 폭력이나 위협 유무에서 동의 유무로 바뀌고, 부부 강간도 처벌할 수 있게 판례가 변경된 반면에 간통죄가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폐지되고, 매춘 처벌에 대한 위헌 주장 역시 힘을 얻고 있는 것은 이렇듯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중시하는 자유주의적 사회관념의 확산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10대남 성추행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케빈 스페이시나 동료 여성 감독을 성폭행한 혐의로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올해의 여성영화인상> 수상자 이현주 감독이 동성애 커밍아웃으로 동정 여론을 얻으려는 것에 게이, 레즈비언들조차 시선이 싸늘할 것도 역시 타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유린한 것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한편, 1998년 로마 외교회의에서 채택된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규정(Rome Statute of the International Criminal Court)은 국제적 차원에서 제노사이드, 반인도범죄, 전쟁범죄, 침략범죄의 정의를 채택한 중요한 조약이다. 원칙적으로 로마규정은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따를 실체법과 절차법을 규정한 것이지만 한국을 포함한 123개 로마규정 당사국은 국내법상 해당 범죄들의 처벌이 가능하도록 국내법을 고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제형사법의 시초라 할 수 있는 헤이그 육전규칙,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뉘른베르크 및 도쿄 국제군사재판소 헌장과 판례, 제네바협약 규정과 국제적십자사 해설서 등은 성폭력을 처벌할 규정을 두고는 있었지만 제한적이었고, 그나마도 여성 개인의 인권을 강조하는 현대적 시각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표현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전시 민간인 보호에 관한 제네바 협약(IV) 제27조는 여성들이 “여성들의 명예에 대한 공격, 특히 강간, 강제 매춘이나 여하한 형태의 성추행(any attack on their honour, in particular against rape, enforced prostitution, or any form of indecent assault)”으로부터 특별히 보호되어야 한다고 규정하여 강간, 강제 매춘 등을 여성의 인권 침해가 아니라 여성의 명예, 정조의 침해라 보았다.
제27조에 대한 국제적십자사의 해설 또한 구태의연하게 강제매춘을 “여성에 부도덕함에 강제하는 것(forcing of a woman into immorality)”이라 정의하여 결과적으로 강제매춘 피해자들을 “부도덕한 여성”으로 낙인 찍어 버렸다.
따라서 1998년 로마 외교회의에서 페미니스트 단체들은 젠더 정의를 위한 여성 코커스(WCGJ; Women’s Caucus for Gender Justice)라는 연대체를 조직하여 로마 규정에 여성 권리에 입각한 현대적 성폭력 규정을 삽입하기 위하여 우호적인 정부 대표단들을 통하여 로비 캠페인을 벌였다.
특히 WCGJ는 국제형사법 체계에서 성범죄의 중대성을 높이는 수직적(vertical) 개혁과 성범죄 규정을 늘리는 수평적(horizontal) 개혁에 힘을 기울여 특히 후자에서 성공적이었다.
로마 규정은 강간(rape), 성 노예제(sexual slavery), 강제매춘(enforced disappearance), 강제임신(forced pregnancy), 강제단종(enforced sterilization)이나 기타 비슷한 심각성을 가진 다른 성적 폭력(sexual violence)을 반인도범죄나 전쟁범죄를 구성하는 독립적 행위로 규정하는데 성공했으며, 젠더(gender)를 근거로 한 박해도 반인도범죄의 구성 행위에 포함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저자인 Halley 교수는 이러한 서구 법페미니스트들의 노력에 무조건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이 아니다. 오히려 여성에 대한 사회구조적 예속에만 천착한 페미니스트 진영내 급진파들이 전쟁의 전체적 맥락을 도외시한 채 여성의 피해 처벌에만 집착하고, 국제형사법을 이용하여 각국 국내정치를 대체하려는 법 만능주의에 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유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회의의 사례는 한국의 미투 운동에서도 참조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한국에서 그동안 미투 운동이 힘을 얻으면서 그동안 쉬쉬하던 성폭력이 폭로되었지만 정작 강간죄,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 등의 법규정은 변한 것이 없다.
이러한 제도 개혁은 사회학과 법학에 조예가 깊은 전문가들과 정무적, 전략적 판단에 능한 시민사회가 힘을 합쳐야 가능할 것이다.
국제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여성 활동가들이나 법학자들이 단순히 서구 페미니즘이나 법규범을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 규범 형성과 논의 진척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자체적으로 깊은 전문성과 논리, 전략이 필요하다.
최근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직장 성폭력과 성희롱 근절협약(안)의 경우에도 한국이 지리적, 언어적 장벽을 이유로 방관자 입장을 취하지 않길 바란다.
아울러 로마규정 사례에서 보듯이 법 만능주의의 한계와 맹점 또한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성범죄 처벌이 강화될수록 이를 악용하는 무고 사례도 늘어나는 것이 불가피하다. 여성을 포함한 모든 행위자는 주어진 법제도적 조건 내에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유인이 있기 때문이다.
교수들간 파벌 싸움 속에 학생의 거짓 성추행 대자보로 괴로워하다가 결국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한 손현욱 동아대 교수의 비극은 그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Janet Halley, Rape at Rome: Feminist Interventions in the Criminalization of Sex-Related Violence in Positive International Criminal Law, 30 Mich. J. Int’l L. 1 (2008).
https://repository.law.umich.edu/mjil/vol30/iss1/1